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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닮지 않았는지
산업자본주의는 어쨋거나 가치를 창출하기는 합니다.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요. 비록 그 과정에 투입된 노동력과 자연에 대해 제대로 갚아주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금융자본주의는 가치 창출과는 아예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코 지속가능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춘추전국 시대와 마찬가지로요.
패권적으로 쌓아올린 부와 영광,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공적에 대해서는 이제 보다 냉정하게 평가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가 한 말 중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가 주의해야 할 점"이라는 게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쪽 문화권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지칭하는 '히말라야 래빗'이라는 표현이 있나 봅니다.
우리가 혹시 이런 '히말라야 래빗'을 닮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높은 곳에 서 있는 이가 정말 그 아래에 있는 이들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여기고 있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반성을 통해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또 이렇게 겸손해지면 존재론적 패러다임 속에서 자기 것을 무턱대고 끝까지 추구하는 무식함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속에서 서로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죠.
하지만 근대 사회는 우리가 계속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닮아가도록 추동합니다. 심지어 자녀를 교육할 때조차 우리는 경쟁력을 강조합니다. 남보다 더 강한 존재로 크기만을 바라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소통의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름이 뭐냐?"…우리 문화의 관계론적 전통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것과 달리 굉장히 아름답고 인간적인 문화가 많이 있습니다. 관계론적 원리에 따른 인문학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전통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제가 이런 것입니다. 먼저 제 감옥살이 경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한 30명 정도가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저는 대법원까지 올라갔다가 파기 환송되고, 다시 재판 받느라 좀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소했습니다. 그랬더니 누가 "조금 일찍 왔더라면 고암 이응노 선생님을 만날 뻔 했는데…"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이 선생님과 함께 지냈던 분을 찾았습니다. 한 젊은 친구가 감방에서 함께 지냈더군요. 그 친구에게 이 선생님에 대해 물었더니 "괴팍한 노인네"라는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왜냐? 자꾸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쪽 팔리게 말이죠. 교도소에서는 이름을 잘 안 부르거든요. 수번으로 불러요. 저도 제일 잊어 버리지 않는 숫자가 교도소 수번이거든요.
그런데 이응노 선생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이 뭐냐고 묻고 다닌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켜서 어떻게 번호로 부르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 친구가 자기는 응일이라고 대답했더니 "아 뉘집 큰 아들이 징역 들어왔구만" 그러시더래요. 자기가 맏아들이 맞다더군요. 그 친구는 이 선생님에게서 이런 대답을 듣고 밤새 한잠도 못 잤다고 하더군요.
이 선생님 세대의 분들은 사람을 결코 따로 떨어진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들여다 봅니다. 누구의 자식인가. 누구의 형제, 누구의 친구인가라는 틀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관점이 아주 삭막하기만 한 근대의 존재론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관계론적 원리라 할 수 있지요.
조화와 균형의 예술, 붓글씨에서 관계론적 원리를 찾다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제가 붓글씨를 잘 쓰는 편입니다. '처음처럼' 소주도 있잖아요. (웃음) 그 외에도 제가 붓글씨 써서 크게 걸어놓은 게 제법 많습니다. 한문도 잘 쓰고요. 그런데요. 붓글씨, 즉 서도라는 것은 서양에는 없는 예술 장르예요. 제가 서도의 관계론에 관한 책도 쓴 적이 있는데요. 서도는 동양의 관계론적 원리가 아주 잘 녹아 있는 장르입니다.
붓글씨를 쓸 때는 처음에 쓴 획의 각도가 비뚤어졌다고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쓰지 못 합니다. 그 다음 획을 통해 결함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안 되면 다음 획으로, 또 안 되면 다시 다음 획으로…. 또 글자가 틀리면 역시 다음 글자로 고쳐야 하죠. 한 행의 잘못은 그 다음 행으로 보완하고요. 이런 식으로 고쳐가면서 쓰다 보면 글씨를 쓰는 내내 굉장히 여러 곳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그래서 붓글씨를 쓸 때는 굉장히 긴장해야 합니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전체를 동시에 봐야 하거든요.
그리고 붓글씨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굉장히 큰 종이에 조그만 글씨를 쓰면 안 되죠. 조화가 안 되니까요. 저 정도의 수준이 되면 붓글씨 쓸 때 까만 건 안 봅니다. 하얀 게 어디에 얼마나 남았나를 봅니다. 디자인 전공하는 분들이 제가 붓글씨 쓰는 것을 보더니 "선생님은 네거티브 스페이스만 보시는군요"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까만 것과 하얀 것만으로 붓글씨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요. 전체적으로 하나의 글씨가 완성되면 빨간 낙관도 들어가고 정서도 들어가서 최종적인 균형을 이룹니다.
이런 하나 하나가 모여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이 동양 미학의 절정이라고 하는 서도의 미학입니다. 글자 한 자, 획 하나 잘 쓴다고 좋은 글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글씨를 가져오길래 저는 "서구 시민적 질서는 잘 잡혀 있구만"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웃음)
서도는 관계론의 예술인데, 그것은 어떤 배타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란 없다는 생각에 바탕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 공유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절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지극히 기계적인 곳이 돼 버립니다.
면벽 명상으로 건진 기억…"왜 1월1일을 특별하게 여기나요?"
또 징역살이 이야기를 할 게요. 제가 징역살이를 20년 정도 했는데, 그중 독방에 있었던 기간을 다 합치니 5년 정도 되더군요. 그 5년 동안 제일 열심히 한 것이 명상, 면벽 명상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오늘의 주제도 소통인데, 그렇게 면벽 명상을 열심히 하다보면 뭔가 소통된다는 것이에요. 우주의 정보진리체계와 통한다는 것 아닙니까. 갇혀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솔깃한지 모릅니다. 단전호흡하면서 아주 열심히 해 봤는데, 절대로 소통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제가 명상의 방법을 바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하나씩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까지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이죠. 단지 기억만 떠올리는 게 아닙니다. 당시의 경험을 추체험하면서 나이 든 상태에서 다시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감옥에서 다시 겪어 보면 굉장히 많은 것들을 새로 발견하게 됩니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제가 4살 때부터 기억이 나더군요.
또 굉장히 저와 가깝고 함께 오래 지냈지만 제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잠깐 만나고 말았지만 제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학교에서 1월 1일에 학생들을 소집했습니다. 신년식을 한다는 것이죠. 당시에는 학교에서 그런 행사를 하곤 했어요.
신년식을 마친 뒤 선생님께서 신년을 맞이하는 각오에 대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다들 뻔한 이야기를 했지요. 저도 심부름 잘 하고, 숙제 잘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순서가 중간쯤 가니까 한 친구가 독특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친구는 공부도 못 하고, 집도 가난해서 별로 주목받지도 못 하고 학교에서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일어서더니 자기는 시간은 원래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굳이 1월 1일이라고 특별하게 여기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 교실이 조용해졌어요. 저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요. 물론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죠. "내가 저런 이야기를 할 걸." (웃음)
만약 제게 조금이나마 사색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신년식에서 들었던 강물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합니다.
5년 동안 독방에서 지내며 면벽 명상을 한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란 뭐냐? 결론은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들, 내가 겪은 모든 사건들. 이 모두가 나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과 내가 살았던 사회, 우리 시대의 파란만장한 사건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나의 고유한 배타적인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가장 훌륭한 사람은 자신을 살고 있는 시대를 삶 속에 가장 깊숙이 끌어들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가 오랫 동안 진행해 온 근대기획의 결론으로 내면화된 존재론적 문화, 존재론적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습니다.
자신이 겪은 것이 유일하다고 믿는 데서, 또 자신의 존재성을 강화하려는 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여지가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물론 존재론적 문화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우직한 이의 세상 보는 법 배워야…"머리에서 가슴으로 향하는 여행"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여섯 번째 주제는 "2개의 가장 먼 여행"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에 태어나서 학습과 포섭에 의하여 기존의 문화와 의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기존의 사회의식에 대한 우직한 독법을 키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문화, 즉 근대성과 자본의 원리, 존재론적인 원리에 던져져서 세상의 기존 질서를 부지런히 배우기만 한다면 사회의 변화, 발전의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반대로 사회를 자신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만 있다면 그래서 누구나 사회에 자신을 발빠르게 맞춰가기만 한다면 사회가 변화할 계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우직한 사람, 좀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회를 지금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바꿀 수 없을까 하면서 노력하는 가운데 사회는 조금씩 바뀌어 왔습니다.
기존의 사회 의식이 얼마나 편견에 치우친 것인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어떤 특정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깃든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인식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지혜로운 이들이 아닌 어리석고 우직한 이들에게 생겨납니다. 세상에 너무 쉽게 적응하는 이들에게 이런 능력은 필요없는 것이니까요.
우직한 이들이 세상을 보는 법, 기존의 사회의식에 대한 우직한 독법은 원래 언론의 몫입니다. 언론의 역할은 단지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언론의 바른 역할은 이런 우직한 독법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독법으로 세상을 읽어내면서 자신을 완성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것을 "2개의 먼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여행입니다. 첫 번째 여행은 프럼 헤드 투 하트(From head to heart), 즉 자신의 우직한 독법으로 깨우친 주체적 인식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간적인 애정과 결합시켜가는 과정이지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제가 실토할 게 있습니다. 몇몇 친구들에게 좀 미안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징역을 살아 놓고도 사람에 대해 이렇게 모르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을 예술품으로 빚어내는 사회…"가슴에서 발로 향하는 여행"
또 하나의 먼 여행은 가슴에서부터 발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발에 도달한다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의 인성 고양뿐 아니라 동 시대의 가장 많은 이들이 고뇌하는 현장에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슴이 나무라면 발이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회는 한 인간이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이르는 여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제일 좋은 사회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처럼 그 속의 사람들을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훈도해주는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편달은 어떤 사람을 걸어가게 하고, 그 라인에서 일탈하면 그것을 채찍질해서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훈도는 큰 가마에 집어넣고 따뜻하게 구워낸다는 뜻입니다. 편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지요.
이런 훈도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문화가 성숙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를 누가 만들까요. 인문학적 가치도 소멸되고 그 자리에 화폐 가치라는 계량적 가치가 들어서 있는데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집단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집단이 없는 사회는 매우 불행한 곳이지요.
언론이 신뢰집단이 될 수 있으려면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일곱 번째 주제는 이런 신뢰집단과 언론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신뢰집단의 역할을 해야 할 곳이 바로 언론입니다. 언론은 진실과 비판을 본령으로 합니다. 진실은 사실의 창조적 구성이며 이런 창조는 당대 사회의 과제를 중심에 둔 비판적 기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비판은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우직한 실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기관이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 충실해야 사회 일반의 신뢰를 받는 신뢰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신뢰 집단은 소통의 중심이며 이항대립의 극단적 갈등을 지양하는 주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뢰는 사회성의 핵심이며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은 희망이고 희망은 신뢰에서 나옵니다.
최근 언론을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한 프로슈머의 개념이 언론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언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뉘어 있는 구도 속에서 언론권력이 자신들이 조직한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프레시안〉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처럼 독자들은 더 이상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프로슈머, 즉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존재가 돼 가고 있습니다. 이들과 언론의 쌍방향 소통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새로운 사회 문화를 어떻게 키워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프레시안〉을 포함한 언론의 숙제가 될 것입니다.
앞서 언론의 본령이라고 이야기한 진실과 비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단순한 사실은 작은 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을 그릇으로 뜨면 그 그릇에 담긴 것이 바닷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다라는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못 합니다. 언론이 객관적인 사실을 얘기한다고요. 그것은 거짓말이지요. 어떤 사실을 헤드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수용자에게 관여할 수 있습니다. 사상은 선택입니다. 수많은 사상 중 어느 것을 선택해 그 선택된 사실이 어떤 발언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언론 권력이 해 온 역할이었습니다.
언론은 사실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사실을 진실로 창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캐물어야 합니다. 사회를 우직하게 읽고 그래서 조금씩 바꿔내는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사실을 새롭게 선택하고 구성하고 조직하여 진실을 창조해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여럿이 함께" 모인 지혜의 힘
언론의 역할에 대해 시사점을 주는 사례로 프란시스 골튼이라는 통계학자이자 유전학자가 겪은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분이 어느 날 시골 장터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황소 한 마리를 무대에 올려 놓고 그 소의 몸무게를 맞추는 퀴즈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얼마씩 낸 뒤, 각자 소의 몸무게를 종이에 적어 통에 넣고 제일 가깝게 맞춘 사람이 각자가 낸 돈을 모두 가져가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골튼이 지켜보던 날은 800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소의 몸무게를 얼마나 맞출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아마 아무도 못 맞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통을 열어 확인해보니 정말 맞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걸 조사해보니 13명은 무엇을 적었는지 판독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걸 빼면 787장이 남는데, 거기에 적힌 숫자들을 다 더해서 다시 787로 나눴더니 1197파운드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소의 몸무게가 얼마였는지 아세요. 1198파운드였습니다.
어쩌면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였는지도 모르지요. 저울이 틀렸을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보고 프란시스 골튼은 크게 뉘우쳤습니다. 단 한 사람도 맞추지 못 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죠.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쌍방향 소통이 발달한 인터넷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요.
제가 감옥에서 나와서 붓글씨로 처음 쓴 내용이 "여럿이 함께"였습니다. 다들 참 좋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한글 액자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잘 아는 후배 교수 한 사람이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어요. "여럿이 함께"라는 말에는 방법만 있고 목표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럿이 함께 어디로 가자는 거냐. 그건 방법이지 목표가 없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가 글씨 아래에 방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라고요. 여럿이 함께 가야 할 목표는 이렇게 생겨난 길 위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목표는 길 위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특히 언론은 이런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대중은 잘 알아요. 아무리 강조하고 크게 활자를 뽑아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그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인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때 대중에게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언론은 비로소 신뢰받는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아래로 손내미는 연대…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최근 바다이야기 사태에는 끼어들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신뢰집단이 없는 사회는 이항대립만 남아 있는 사회가 됩니다. "가위와 바위만 있는 가위바위보"가 됩니다. 보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낳기 마련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 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소모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인간이 사회 속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언론이 담당해주길 바랍니다. 이런 역할이 제대로 이뤄질 때 진정한 사회통합도 가능해지겠지요.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여덟 번째 주제는 사회통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가장 잘 들여다보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사회 통합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자리에 설 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우리는 강물을 닮아야 합니다. 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물은 항상 아래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바다가 됩니다. 가장 큰 물, 가장 낮은 물. 그것이 바다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니까 이름이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래로 손을 내미는 연대를 하방연대라고 부릅니다. 한 사회의 역량은 내부 소모를 줄이고 통합의 외연을 확대함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통합은 낮은 곳, 약한 자와 연대해 나가는 하방연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 이처럼 아래를 향하지 않는 연대나 통합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신들보다 강한 세력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불안에 바탕한 연대는 자칫 자신들보다 약한 세력에 대해서는 매우 오만한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하는 통합과 연대는 추종이나 야합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찰의 힘에서 비롯된 당당한 자부심
오늘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주제는 '성찰과 양심, 그리고 주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언론 매체를 대할 때 그냥 한 번 보고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언론은 사회의 빠른 변화를 쫒아가며 표면의 출렁거림만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론의 역할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진실의 창조'입니다. 그리고 사실 보도를 넘어서 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문화를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성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역사 상 대표적인 성찰론자를 꼽으라면 장자를 들 수 있습니다. 장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개구리와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메뚜기와는 얼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개구리는 우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고, 메뚜기는 한 철밖에 살지 못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찰은 바다와 얼음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지엽적인 한계에 갇혀 바다와 얼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개구리나 메뚜기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큰 시야에 바탕한 성찰을 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또 양심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적으로 조금 더 잘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인간적인 자부심, 자존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과 자존심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과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오늘 강연을 마칠까 합니다.
또 감옥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우리 방에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가 신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주는 수의만 입고, 알루미늄 식기 2개와 숟가락만 갖고 들어온 거예요. 심지어 런닝 셔츠도 입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참 딱해서. 치약도 좀 나눠주고 런닝 셔츠도 하나 벗어줬거든요. 그랬더니 필요없다면서 바로 거절하는 거예요. 표정도 어둡고 말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이상한 놈이라고 했어요.
이튿날 세수할 때 제가 다시 치약을 좀 나눠줬거든요. 그랬더니 "필요없다니까요"라고 하면서 세탁비누를 집어서 그걸로 양치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 보는 데서 나눠주려던 제 행동이 좀 부족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새 치약을 하나 따로 사서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줬어요.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 다 듣게 큰 소리로 "필요없다고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한 달 후에 제게 다가오더니 "선생님, 치약 하나 사줄 수 있어요? 선생님한테는 받아도 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안 그래도 좁은 잠자리를 제가 또 양보해야 하잖아요"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친구는 사람이 역경 속에서 살아갈 때 약간의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는 게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떳떳하게 자부심과 주체성을 잃지 않는 게 어려움을 견디는 데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 친구는 저처럼 개념어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것이지요.
자부심을 키우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언론이 앞장서야
이런 자부심과 주체성을 키워주고 존중해주는 사회, 다양성과 인간적 가치가 존중받는 문화는 이런 사회적 토양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토양을 만들어 가는 데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더구나 〈프레시안〉과 같은 인터넷 매체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일방적으로 주장을 전달하기만 하는 매체가 아닌 까닭에 이런 역할을 담당하기에 더욱 제 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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