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1)
그전까지 그의 책 대부분을 다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글들을 좋아했었다.
밥벌이의 지겨움에 실린, 미끼만 먹고 낚시바늘은 뱉어버릴 수 없다는 말은 내 상투어였다. 

하지만, 그의 발언과 김정란님의 글을 읽고, 더이상 그의 글을 사지 않으려 했다.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27808

잠깐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내 의형은 김훈님의 강산무진을 건네 주었고,
그에게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렇지만 그의 글은 거부할 수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 그는 남한산성을 출간하였고, 여러 기사들을 읽으며,
끔직했던, 나의 목록에서 프랭크 밀러를 지워버린 계기가 되었던 영화 "300"을 떠올리고,
정성일 씨의, 발터 벤야민의 미학과 정치에 대한 언급을 떠올렸다,
정치적 올바름을 잃은 미학은 타락하고, 미학을 잃은 예술은 프로파간다가 된다는.

미국에서 로쟈님과, 기타 여러 리뷰와 인터뷰들을 리뷰했고, 
귀국하자 마자 남한산성을 구입하고 단단히 벼른 채 읽어 내려 갔다.

정치적 올바름을 잃은 미학은 타락한다. 

.
.
나는 후배에게 소설을 읽기 전 담아 두었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김훈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서정주님과는 다른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정윤철: 많은 영화인과 감독, 심지어 관객마저도 평론에 불만을 제기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생각해야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그것으로 영화 전체를 평한다는 거다. 나도 그런 경향이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식으로 비평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니면 좋을 텐데.

정성일: 똑같이 반문하겠다. 그 질문 자체가 영화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영화는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다. 예를 들면 정윤철이 시나리오를 쓸 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쓰는 순간 세상은 이미 시나리오에 끌려온다. 이 인물은 합당한가, 나는 2007년에 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나, 이 이야기가 세상과 어떤 호흡을 이루는가, 가족이라는 토픽을 던질 때 내 화두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한)세계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적 세계에 닿아 있다. 감독들은 홍상수가 가능한 세계 1을, 정윤철이 2를, 김기덕이 3을, 임권택이 4를 만든다. 즉,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을 둘러싼 여러 (가능한) 세계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 세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럼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비평가들이 가능세계를 만든 영화를 보고 현실세상의 변화 의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봐달라고 한다면 가능세계는 현실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불가능 세계가 된다. 우리가 헐리웃 영화를 보며 후진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거다. 영화를 영화로 봐라, 그렇다면 <300>을 보면 되는 거다. <300>이 영화의 참맛인가.


정윤철: 무엇이 좋은 영화이고 나쁜 영화라고 여기는가?

정성일: 나는 이런 말을 인용하고 싶다. 차이밍량이 서울에 왔을 때 누군가 질문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차이밍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그렇지만 내 문제만이 아닌 어떤 거대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정성일: 그럼 파시즘이 되는 거지.


정윤철: 환경문제나 남의 문제들을 걱정하는 영화가 나쁘단 말인가?

정성일: 나는 그때 영화가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적 프로파간다도 있고 보수적인 프로파간다도 있지만 비슷하다. 나는 똑같은 사건(미국 컬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영화라고 해도 <엘레판트>는 지지하지만 <볼링 포 컬럼바인>은 지지하기가 힘들다. <볼링 포 컬럼바인>은 폭력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이해해도 괜찮은 건가. 폭력이 이해되는 순간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부조리하다는 질문을 던지고, 가능해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미학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봐달라고 했는데, 우리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나. 숭고하다고.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숭고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미학에 사로잡히는 것이 타락의 징후로 보인다. 눈을 움직이는 건 미학이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건 숭고함이다.


어떤 이에게 영화란 종교적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정윤철: 영화가 재미있고 분석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영화만이 갖고 있는 상호텍스트성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야기에 세상이 담겨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읽혀지지 않는 영화를 보면 어떻던가?

정성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아무런 정치적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거대담론도 없고,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딸을 시집 보내는 게 전부인데도 그 영화는 진행이 너무 기괴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오차즈케의 맛>을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그 영화는 오즈의 다른 영화들처럼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타이틀이 올라올 줄 알았다. 남편은 여행을 떠나러 공항에 갔고 아내는 문제가 해결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즈의 영화에 언제나 나오는 방식으로 텅 빈 방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밤중에 귀신처럼 남편이 돌아온 거다. 이 사람이 미쳤나,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는데, 남편이 비행기가 고장 나서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그러다가 밥을 좀 먹자고 그런다. 그 집은 언제나 식모가 밥을 했는데 한밤중이니까 집에 간 거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내가 남편을 위해 밥을 한다. 오차즈케를. 오차즈케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다. 남편은 자수성가를 했지만, 아내는 부유한 사람이어서 오차즈케를 촌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반찬이 오차즈케 뿐이었다. 부부가 저녁 식탁에 앉았는데, 이건 절대 나누지 못할 거야, 나누는 순간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즈는 그 장면을 나누었다. 그 순간 오즈는 왜 그 장면을 쪼갰는가. 그는 감독으로서 결단하듯 내리친 거였다. 쪼개는 순간 이 구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그 결단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를 찍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찍어서 두 사람의 감정을 자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즈가 그걸 자르고 진행한 것은, 투샷으로 찍어서 시간이 진행되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관객은 그 장면을 이미 투샷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 장면에서 남편은 친구를 만나 여행갔다 온 이야기를 한다. 전날 밤 남편이 돌아온 것이 아내의 꿈이었는지, 남편이 진짜 집에서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난 건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순간은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다. 숏을 쪼개는가 마는가, 진행을 하는가 마는가, 마음을 나눌 것인가 이을 것인가의 결단. 오즈는 나에게 이 배움을 줬다. 영화는 세상이지만 쇼트는 그자체로 우주다. 그래서 쇼트는 항상 영화보다 크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영화는 세상을 쫓지만 쇼트는 잡는 순간 완결된 우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트를 쪼개는 건 우주를 자를 것인가 말것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것은 브레송에게도 르누아르에게도 히치콕에게도 당연히 묻게 되는 질문이다.


정윤철: 그런 상호텍스트성이나 함의가 없더라도 영화 자체가 신선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 영화의 형식 자체가 사유를 하게 만들고 새로움을 느끼게 해준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은가.

정성일: 이건 개인적인 느낌인데 나는 켄 로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그냥 정치를 다룬다. 나는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 촌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 때는 행복하다. 정치적인 영화는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즈가 <오차즈케의 맛>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을 때, 그것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롱테이크로 찍었을 두 부부의 식사 장면을 샷을 나눠서 한 명씩 잡았음) 전후 일본사회에서는 오즈에게 있어 숏을 쪼개는 그 결단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전후 일본이 패전을 딛고 경제성장을 향해 나아갈 때 가족이 어떻게 쪼개지느냐, 개인화, 파편화 하느냐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다루진 않지만 샷을 쪼개는 것 그 자체가 오즈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정윤철: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와 영화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르다는 말인가.

정성일: 나는 후자를 지지하고 싶고, 후자가 항상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영화를 진행하며 해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일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함부로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영화는 쓰레기야, 네가 창조한 인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면 너는 파산한 거야, 그런다. 그것이 아무리 미학적인 것이더라도. 나는 미학적인 결정보다 상위에 있는 결정은 윤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윤리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도덕과는 다르다. 나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미학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학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뿐만 아니라 몰락한다. 미학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모든 예술은 타락을 경험했지 않았나.


정윤철: 당신이 자주 인용하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생각난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정성일: 그 문장을 김우창 번역으로 스무살에 읽었다. 이후 모든 판단에서 하나의 좌표가 되었던 말 중의 하나다.


정윤철: 영화 자체의 미학과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늘 대립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가.

정성일: 아니, 그 반대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것을 누군가는 미학적으로 이해하고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거다.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미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하고, 정치적으로만 본다면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다루고 있다. 창조를 다룰 때는 미학과 정치, 혹은 삶과 사회, 혹은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과 도래해야하는 시간, 그 둘 사이의 중재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임무 중의 하나는 창조적 중재에 있지 않을까. 오직 예술가들만이 창조적 중재에 나선다. 정치가들은 협상을 하고, 장사꾼들은 판매할 뿐이다. 누구도 중재는 하려 들지 않는데, 그것을 해결할 임무가 예술가들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그 중재의 기술을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다.


by maybe | 2007/07/11 17:32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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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Dreaming Pro.. at 2007/07/17 12:13

제목 : 재현과 그 폭력
남한산성(1)메이비 님의 글을 읽으며, 최근 제가 가장 문제시 하는 이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재현과 그 폭력에 대한 사유입니다. 이미 들뢰즈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밝혔듯이, 현대 예술, 특히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이라고 일컫는 산업화된 예술은 재현이 재현으로 끝나지 않고, 폭력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아이콘의 형식으로 있던 그림이나 궁정문학 역시 그 재현의 도구를 사용해서 몇몇 정치세력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점......more

Linked at Dreaming Proton .. at 2007/07/17 12:13

... 남한산성(1)메이비 님의 글을 읽으며, 최근 제가 가장 문제시 하는 이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재현과 그 폭력에 대한 사유입니다. 이미 들뢰즈를 비롯한 많은 ... more

Commented at 2007/07/1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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