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꽂아다오

- 최 승 자 -



누군가 떠오르는 사랑 노래가 무어냐면 이 노래라 하겠다.


읽을 때마다, 이 시는 살아서 움직인다.
마지막 연이 앞으로 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거대하게 커지기도 하고.
모든 연이 1연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뱉어지고.
사랑은 삶이란 거죽을 토해내 뒤집어쓰고, 혹은 삶은 사랑이라는 거죽을 삼켜버리고.
흡사 automation이 동반된 설치 미술같다.
혹은 자연사 박물관의 거대한 공룡뼈.
무엇이든.

꺾이어진 팔과 다리에서는 무엇이 돋아날까
d o y o u b e l i e v e i n

어찌 되었든.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 하지 않으며
헛됨을 이룬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려려고 한다,
적어도.

by maybe | 2007/06/19 13:22 | 최 승 자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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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보클레어 at 2007/06/22 15:42
maybe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최승자 시인의 시는 때로는 '충격적'입니다. 이 시가 특히 그러네요. 허무와 퇴폐의 발 밑을 흐르는 끈쩍끈쩍하고 뜨꺼운 마그마같습니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꽃아다오'라는 시구에서 받은 임팩트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Commented by 복숭아 at 2007/06/23 01:54
안녕하세요. 아는 분의 블로그를 거쳐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최승자 시인은 학교에서 여성학과 관련한 수업의 발표를 준비하느라 조사한 기억이 있는데 이 시는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인간이 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예찬하였으나 단지 언어로 남은 사랑은 공허할 뿐이지요. 언어를 전공하는 입장이 되니, 어쩐지 공부를 할수록 언어는 힘이 없고 허무할 뿐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언어로 달콤하고 위대한 사랑을 속삭인다고 한들 사랑이 끝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거죠.

'경마장 가는 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 생각나네요. 당시에 저는 사랑만 있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던 나이였고, 그때까지 읽은 책들은 경제적 활동과 동떨어진 연애 이야기만 있었기에, 사랑을 하면서도 돈을 벌고 지치고 화장실에 가고 사랑 없는 섹스를 하고 사랑 아닌 것에 슬퍼하는 내용은 정말 머리를 얻어 맞은 것처럼 얼얼한 느낌이었어요. 이 시도 역시 삶 속에 사랑이란 것이 뭔가 생각하게 해주네요. 아직 저는 낙관적이지만 말입니다.
Commented by maybe at 2007/06/25 23:47
보클레어님/ 최승자 님의 시는 참으로 생명력이 충만하답니다.
로쟈님(http://blog.aladdin.co.kr/mramor)은 김훈 글은 퇴근길 저녁 시내버스에서 잘 읽힌다고 하셨는데, 저는 생기가 소진되었을 때 최승자 님의 시를 읽습니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랭보, 보들레르 보다, 한글을 쓰는 제게는 최승자님이 더 소중하죠.
Commented by maybe at 2007/06/25 23:48
복숭아님/ 황량한 불모의 블로그에 아리따운 미소녀의 향기가. 그 "아는 분"께 신의 은총을! 님 블로그는 몰래 눈팅을 하곤 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님의 짧은 산문들을 좋아합니다.

시인은 사랑을 긍정하고, 갈구하는 것 같습니다,
저라면, "네 팔과 다리를 분질러"라고 썼을텐데요.

저는 "언어"의 힘을 긍정합니다. 보들레르나 랭보의 "언어"가 프랑스 인들의 삶을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펜이 총보다 위대하지요. 물론, 극히 소수의 언어만이 그런 힘을 가지겠지만.
시인은 창조자요 동시에 순교자이지요. 인세가 좀 더 오르고, 통일이 되어 시장이 더 커지고, 나아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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